아픈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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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손가락

봄꽃 0 585 2024.09.20 11:22

지난 달 말 한 병실의 환자분 따님이 약간은 격양된 목소리로 

"수녀님 저희 아버지 세례 받기로 하셨어요~!" 

늘 씩씩하고 쾌할한 따님은 서울 모 성당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신자였고, 사실 환자분을 빼면 가족 모두 가톨릭 신자였다. 

오랜 시간 가족들의 권유에도 응하지 않으셨던 환자분은 이제 말기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여셨다.

환자분은 삼척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이셨고, 눈빛은 정겨우셨으며 마음은 따뜻한 분이셨다.

그분이 그려내는 시 대부분이 자연을 모티브로 해서 인지 자신의 질병과 상황을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고 계시는 중이셨다. 

덤덤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세례를 받기 위해 신부님을 모시는 절차는 예상보다 어렵고 힘들었다. 

임종 전 환자분이 세례를 받겠다고 하면 그 어느 신부님이라도 한걸음에 달려와 줄 거라는 내 생각과는 달리

그분이 살고 있는 지역의 본당 신부님은 전화 통화 한번 하기 쉽지 않았고 

어렵게 만난 신부님은 병원 담당 신부님이 해주는 거라며 영혼 구원의 기회를 다른 목자에게 양도?하셨다.

갈바리도 병원 전담 신부님이 계시지 않는 관계로 여기 관할 지역 본당 신부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흔쾌히 해주시겠다고~! 

그리고 따님의 요청으로 아버지는 세례를 받던 당일 세례성사, 견진성사, 병자성사, 성체성사를 한번에 받는 축복도 받으셨다.


사실 이런 절차로 인해 시간은 꽤 많이 지체되었고 환자분의 상태는 조금은.. 나빠지셨다. 

앉아서 계실 수 있던 자세는 이제 통증으로 인해 앉을 수 없었고, 식사도 누워서 하셔야 했다. 

집중할 수 있는 시간도 눈에 띄게 줄어들어 간단한 교리였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도 정신은 명료하셔서 늘 곁에 수첩과 펜을 가지고 뭔가를 기록하는 습관은 지속되었다.

고해(화해)성사에 대해 설명 드리며 혹시 보고 싶냐고 여쭤봤더니.. 한참을 계시다

하나 생각난게 있다며..


오래 전부터 딸아이가 성당 가자고 할 때 사실은 가고 싶었다고.. 그런데 성당 가면 기도 손(합장)을 해야 하는데 

기도 손을 하는 게 부끄러웠다고.. 그래서 너희들이나 가라고 했다고.. 

그러면서 형제님은 말씀을 이으셨다. 

"나 그래도 꽤 성실히 산 편인데... 이게 마음에 걸려요.. 허허.. 이거 처음으로 이렇게 말하네.."

실제로 환자 분은 왼손 새끼와 약지 손가락이 없었다.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러면서 형제님은 처음 배우는 성호경을 얼마나 열심히, 정성껏 연습하시던지..

오랜 세월 응답하지 못한 모든 마음을 성호경에 담고 계시는 듯했다. 

곁에 계시던 부인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형제님의 모아진 두 손을 꼬옥 잡아드렸다.


형제님이 주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새롭게 태어남도 너무 기뻤지만,

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던 아픈 손가락이 세상에 나온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주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건 우리의 부서지고 아픈 영이라는 말씀도 함께 떠올랐다. 

내 마음이 이럴진데 

한없이 자비로우시고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기쁘셨을지.. 

아마도 그 고백은 형제님이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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